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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REMEMBRANCE

This Was Our Story

DALL·E 2024-08-30 13.43.53 - A solemn and respectful scene that captures the struggle of J

1. 북한 감옥 옥사자 이름: 정미술(북한의 가족을 위해 익명처리) 생년월일: 1966년생 사망장소: 안전부 구류장 정미술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취미가 많았으나, 희망했던 예술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군대에 끌려가 10년동안 군대복무를 했다. 1991년 어느날 북한 독재자 김정일(김정은의 부친)은 “제대군인들은 어렵고 힘든 부문에 자원 진출하라”며 탄광으로 무리 배치했다. 북한의 탄광은 노동 조건이 열악하여 각종 사건사고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인력난이 심각해지자, 북한 김정일은 1만명 제대군인들을 탄광에 무리 배치했는데, 정미술도 거기에 속한 것이다. 탄광으로 끌려간 정미술은 3년만에 폐결핵에 걸리게 되었다. 1998년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그는 할 수 없이 낡은 자동차 타이어를 떼러 갔다. 그러나 안전부에 붙잡혀 국가재산약탈죄 혐의로 1년 3개월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 북한 감옥은 음식물이 너무 열악하여 수감자들은 밖에서 면회를 가지 않으면 석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그는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열악한 감옥에서 폐렴을 앓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려 몸무게가 30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으나, 북한 당국은 끝내 석방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2000년 1월 감옥에서 원인 모르게 동생과 함께 사망했다. 그와 함께 감옥에 끌려갔던 3명 모두 한날 한시에 사망하였는데, 동료 수감자들은 “안전부가 독살시켰다”는 의혹이 일었다. 북한당국이 그들 3명의 시신을 유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어떻게 처리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DALL·E 2024-08-30 13.44.46 - A PG-rated image depicting the moment before Kim Hae-bang is

2. 북한 공개총살 촬영자 이름: 김해방(가명) 나이: 40대 체포장소: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구역 공개처형장 사망: 2012년 6월 김해방은 2012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 구역에서 자행된 공개처형 장소에서 북한 보위부(국가보위성)에 체포되었다. 그는 단추형 몰래 카메라를 지니고 공개처형 현장을 녹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개총살이 끝나고 북한 보안원들이 공개처형 현장을 쭉 둘러막고 출입구를 한 곳에 만들고 사람들을 하나씩 신분증을 검열한 뒤 내보내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재빨리 옷에 부착되었던 몰래카메라를 뜯어 버리고 출입구를 통과하려고 했으나, 보위원들은 다짜고짜 그를 체포했다. 후에 알고 보니 북한 보위원들이 안전부(경찰)와 협동 하에 그를 잡기 위해 일부러 미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유는 북한당국이 공개총살 장소에 평소보다 사람들을 많이 불러내지 않은 점, 또 공개총살이 집행된 이후 현장을 삥 둘러막고 한 사람씩 통과시킨 점, 그리고 그가 카메라를 버렸는데도 체포한 것이다. 그는 이미 한국에 있는 탈북인권단체와 연계하에 북한의 공개 총살 장면을 몰래 영상으로 찍어 보내던 협조자였다. 그가 보낸 영상들은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도되어 참혹한 북한인권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가 찍은 영상 중에 일본산 혼다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북한 보위부는 이 오토바이 주인이 동영상 촬영자라고 보고, 뒤를 밟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를 체포한 보위부는 함흥시 성천강구역 보위부로 끌고가 한달동안 먹이지도 않고 고문을 들이대어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DALL·E 2024-08-30 14.05.06 - An image of an older Korean man sitting at a desk in a radio

3. 대북방송 요원 이름: 진선락 생일: 1964년 생 직위: 자유북한방송국장 함경남도 요덕군이 고향인 진선락은 식량난이 심각했던 2000년 초 중국으로 탈북했다.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뒤, 자유북한방송 국장으로 5년 동안 활동했다. 자유북한방송은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방송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관련 내용을 매일 방송하고 있다. 진선락은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큰 사건들을 단독 보도하여 북한인권을 알리는데 기여하는 등 불철주야로 노력하던 진선락은 신장 결석 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콩팥 제거 후 신장투석을 받는 와중에도 북한 관련 책을 쓰며 병마와 싸웠다. 2019년 북한 자유화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 제목은 ‘외리’이다.

DALL·E 2024-08-30 13.53.42 - A respectful and poignant image capturing the story of Kim Ch

4. 북한정보 활동가 이름: 김철 사망 날짜: 미상 사망 장소: 14호 정치범수용소 김철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시기에 북한을 탈북하여 중국과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그후 자유북한방송 소속되어 북한과 가까운 중국 단동에 거처를 정하고, 북한 소식을 수집해 남한에 전달하는 대북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09년 11월 30일 북한이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한 이후 최초로 북한의 새 화폐를 수집하여 한국에 전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북한 독재자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무리하게 단행했기 때문에 북한 내부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북한당국이 화폐개혁 후유증을 차단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하던 중에 새 화폐 종류가 세상에 공개되자, 북한 보위부는 내부 유출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철은 북한에 있는 아내와 접선하기 위해 평안북도 삭주군 앞 압록강가로 갔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후에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자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북중 국경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평안남도 개천시 14호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사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체처리 장소 알려지지 않았다.

DALL·E 2024-08-30 13.53.33 - A solemn and respectful image depicting the story of Kim Myeo

5.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장 파견 노동자 이름: 김명남/ 30대 고향 황해북도 사리원시 황해북도 사리원이 고향인 김명남은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장에 파견되었다. 재러임업대표부 제2연합기업소 산하 17사업소에서 일하던 중 나무에 치어 다리가 절단되었다. 러시아 벌목장에 있는 나무는 길이가 보통 20~30미터이고, 어른 둘이서 다 안을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작업도구도 변변치 않아 북한 벌목 노동자들은 작업하다가 사고를 빈번히 당하고 있다. 나무를 찍을 때 한 사람이 기계톱으로 자르면 여러명이 짝지발로 된 나무를 가지고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으로 밀어야 하는데, 바람이반대방향으로 불거나, 넘어지던 나무가 다른 나무에 걸리면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 사고가 발생한다. 북한 벌목노동자들은 일하다 사고를 당해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김명남은 재소임업대표부 내에서 술장사를 하여 약간의 여비돈을 마련해가지고 북한에 돌아갔으나, 1998년 8월 경 굶어죽었다고 한다.

DALL·E 2024-08-30 14.11.03 - An image depicting Kyungman Han in the early 1990s at a bustl

6. 북한 행방불명 실종자 이름 한경만 소속: 재러임업대표부 외화벌이 일꾼 나이 30대 초반 고향: 함경북도 김책시 한경만은 1990년 초에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다. 그는 벌목장 사업소 지배인에게 “돈을 벌어 바치겠다”고 시간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물류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항 근처에 큰 창고를 임대하고 물류 센터를 만들었고, 직원도 여러명 두고 장사를 하였다. 당시 소련이 붕괴된 직후여서 한국 사람들도 러시아 원동지방에 장사를 하러 왔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평소에도 흐지부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가 크게 장사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재러 임업대표부 2연합기업소 제 17사업소 조직비서가 그를 찾아가 “사업소로 복귀하라”고 말했다. 한경만은 조직비서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연합기업소에도 충성자금을 바치고 “장사를 좀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조직비서는 그 돈을 다 빼돌리고 “한경만이 남조선 괴뢰 돈을 받아 장사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보위부는 한경만을 체포하기 위해 유인책을 썼다. 보위부는 “당신이 외화벌이 능력이 좋으니 앞으로 연합기업소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돈을 벌어 바치라”며 유혹했다. 그러면서 “그 외화벌이를 하기 전에 먼저 휴가부터 다녀오라”고 얼렸다. 보위부는 한경만이 귀국을 거부할까봐 북한에 있는 아들더러 “마라톤 경기에서 1등했다는 편지를 쓰라”고 시켜 보내게했다. 한경만과 함께 일하던 지인들은 “당신이 이제 북한에 들어가면 다시는 못나온다”며 귀국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한경만은 “휴가 갔다와서 돈을 많이 벌자”고 약속하고 북한으로 돌아갔으나, 그 뒤 보위부에 끌려가 사망했다.

DALL·E 2024-08-30 14.11.49 - A solemn and tragic image depicting the aftermath of the 1996

7. 개고개 열차 전복사고 사고 발생: 1996년 12월 3일 장소: 자강도 송원군 사망자: 3천~5천명 북한에서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 있던 1996년 겨울 자강도 송원군 개고개에서 열차 전복사고가 발생했다. 전복된 만포-해주행 열차에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장사 떠났던 수천명의 주민들이 타고 있었다. 새벽 1시경 열차가 자강도 전천군과 희천 사이 구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곳은 개고개라는 높은 산이 있었는데, 차굴이 많고 경사가 급한 곳이었다. 그래서 산을 오를 때는 견인기 한대는 앞에서 끌고 다른 한대의 견인기는 뒤에서 밀어야 개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산을 내릴 때는 한대가 앞에서 끌고 다른 한대는 뒤에서 제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견인기가 부족해 한대로 끌게 되었다. 열차에 공급되는 전압도 낮아 견인기가 제 마력을 낼 수 없었다. 열차는 견인기를 포함해 여객 차량 13개로 편성되었다. 당시 열차가 며칠동안 다니지 않아 사람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너도 나도 열차에 올랐다. 어림잡아 한칸에 500명 이상 씩 타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로 수천명은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열차가 개고개를 내릴 때 제동이 고장났다. 통제불능이 된 열차는 아래로 가속도가 붙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객차 안에 설자리가 없어 열차 지붕에 탔던 사람들은 이미 열차가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알고 뛰어 내리려고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 바람에 날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견인기와 열차의 이음 고리가 빠지면서 객차들은 수백미터 산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끊어진 사람, 머리가 없는 사람, 머리가 터져 피가 낭자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부상자들도 치료를 받지 못해 계속 죽어 나갔다. 제일 많이 죽은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는데, 군인들이 탔던 칸이 견인기 바로 다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열차에 탔던 수천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사고 이후 북한 당국은 주변의 북한군 기계화 부대를 동원해 객차를 끌어내고 부상자들을 꺼내고 죽은 시체들은 걷어내었다. 북한당국은 이 사고 소식이 외부에 새어나갈가봐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는 한편, 민심이 흉흉해지자 “간첩들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북한보위사령부가 사건 사고 조사를 맡아 진행했다. 사건사고의 책임을 운전을 담당했던 기관사와 개천 철도국 관계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DALL·E 2024-08-30 14.13.11 - A solemn and somber image depicting the harsh conditions duri

8. 금강산 발전소 건설 동원 군인 3만명 사망 사망: 군인 3만명 (탈북군인 주장) 사망장소: 금강산발전소 건설장 기간: 1986-2003년 북한은 “전쟁 준비 완성”을 위해 1986년붵 2003년까지 금강산 발전소 건설을 진행했다. 금강산 발전소는 금강산 일대에서 모인 물을 동해바다로 떨구어 전력을 생산한다는 계획하에 시작됐다. 원래 이 물은 남쪽으로 흘러 내려갔으나, 북한은 임남댐을 건설해 물을 가둔 다음, 동해바다로 100리(40km) 굴을 뚫어 물길을 만들어 흘러보내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하고 수억톤의 물을 가두었다가 유사시 남쪽으로 방류해 서울을 물에 잠구겠다는 이른바 ‘수공작전용’ 전쟁 공사였다. 실제로 안변발전소가 완공되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전기를 거의 생산하지 못한다. 이 공사는 인민무력부 산하 615 관리국이 맡았다. 이 관리국은 금강산발전소 건설을 위해 조직된 군단급 부대로, 4만여명의 북한군인들이 동원됐다. 이 부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남한으로 탈북한 한 북한군 군인은 “19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에 안변발전소 건설에 참가한 군인 3만명이 공사중에다가 죽거나 허약(영양실조)에 걸려 사망했다”고 말했다. 금강산 발전소 공사는 1단계로 임남댐을 건설하는 것이고, 2단계는 금강산에서 안변군까지 100리 구간의 물길을 뚫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설장비 하나 변변히 없는 인민군 군인들은 정과 망치로 암반을 까고, 등짐으로 토사를 나르는 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물길을 뚫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발파를 한 이후 굴간의 화약냄새를 빼지 못하고 군인들이 공사에 동원되었고, 굴이 깊어질수록 오줌과 똥 등 배설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굴안에는 낙수가 흘러 내려 무릎까지 물에 빠지는 곳이 많았는데, 배변에 의해 오염된 물 속에서 군인들이 일했기 때문에 똥독이 올라 피부가 썩었다고 한다. 하루가 멀다하게 굴속에서는 낙반 사고가 발생하고, 영양실조, 피부염 등으로 군인들은 수많이 사망했다. 이 탈북군인은 “우리 부대는 고성군 위남리에 있었는데, 부대 앞산 전체가 군인들의 무덤으로 덮혀있었다”고 말했다. 약 17년간의 공사 전기간 약 3만명의 군인들이 사망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가 속한 부대도 100명에 달했으나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5명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군인들은 임남댐을 가리켜 ‘죽음의 언제(堰堤)’라고 하고, 100리 물길굴을 가리켜 ‘죽음의 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DALL·E 2024-12-07 21.53.58 - A hauntingly realistic and emotional depiction of a small, di

9. 가난이 죄가 되는 독재정권 규탄합니다. 증언자: 윤정순 날짜: 2024년 3월 26일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윤정순입니다. 오늘 저는 부패와 썩어빠진 권력때문에 태어난게 죄가 되어 가난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자유와 인권 없이 영양 실조에 걸려 추위에 떨다 불빛 한점 없고, 겨울 바람막이도 안되는 창고에서 살다가 큰 엄마의 사랑을 받아보기전에 허무하게 죽은6살짜리 어린 조카의 기막힌 사연을 세상에 폭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다섯 자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맏언니는 윤정희이고 28살이던 1999년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습니다. 제 아래 셋째동생은 윤정실인데, 28살 나던 해에 병으로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넷째 동생은 현재 북한에서 살고있고, 막내 동생은 34살에 간복수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내 동생은 제가 보내준 돈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보위부 끌려가 감옥에서 고문과 폭행 으로 7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간복수 진단을 받고 풀려 나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34살의 나이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두살난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1997년에 혜산시로 장사 왔다가 본전을 떼우고 막막한 생각에 중국에 가면 돈을 수 있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 중국으로 넘어가 인신매매 당해 연길이라는 곳에서 중국 남자를 만나 딸하나를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2003년 2월 연길시 투도현에 있는 시누이집에 음력설을 쇠러 갔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그해 다시 중국으로 탈북하였다가 2004년 3월에 2차북송을 당했고, 한달만에 재탈북에 성공해 중국으로 나왔습니다. 그 후 두번이나 복송됐던 두려움 때문에 중국 천진에서 2007년 한국으로 가려다가 실패하여 그해 10월 세번째 북송을 당했습니다. 세번째로 북송되어 신의주 보위부에서 너무 많은 고문을 받았고, 죽을뻔 했으나 다시 2008년에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여 결국 2009년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하여 2018년 처음 브로커를 통해 두차례 걸쳐 3천만원을 보냈는데, 악마같은 북한에 있는 브로커들이 그 돈을 한푼도 동생에게 전달해주지 않았다고합니다. 저는 브로커들이 돈을 받아 동생들 한테 전달해 주었다고 해서 믿고 있었는데, 훗날 들으니 막내 동생이 돈을 받지 못하고 약값이 없어 집까지 팔아 병치료를 하였건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때 제 막내 동생 나이는 34살인데 두살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눈을 감자니 편히 눈이 감겨졌겠습니까? 브로커들은 동생에게 돈을 전달해 주지 않고 중간에서 다 떼어 먹고 들통날 것 같아 동생의 병이 나았으나 마약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저도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해야되는 상황이었기에, 당분간 동생들과 연락을 끊고 살다가 미국 LA에 살고 있는 사람을 통해 그동안 있었던 두동생의 기막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였습니다. 정말 늦은 자책감에 막내가 남겨 놓은 자식만은 꼭 지켜주고싶은 생각으로 2023년 2월25일 량강도 혜산시 신흥동 7반에 살고있는 브로커 오송월에게 조카 양육비를 주면서 데려다 놓게 하였습니다. 6살짜리 조카와 처음 영상 통화를 하는데 정말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막내 동생 얼굴을 똑닮은 조카를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 목놓아 울기도 울었습니다. 가정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다섯 자식을 남겨두고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원망도 수없이 하였습니다. 조카 진군이가 “큰 엄마”라고 부를 때 내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내가 뭘 먹었냐고 물으니까, “시래기 죽만 먹다가 이밥을 처음 먹었다”고 자랑하던 진군이, 그리고 뭘 갖고 싶냐고 물었더니 “겨울 동복이 없다고” 말하던 그 불쌍한 진군이, 그리고 한창 장난감을 가지고 철없이 놀 나이에 겨울 동복이 없다고 말하다니.... 막내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스러운 마음에 “꼭 네 아들은 내가 지켜주리라”하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건만, 조카가 2023년 2월 27일 오송월의 집에서 살인강도의 칼에 맞아 죽었는데 그사실을 이제껏 모르다 있다가 10월11일이 되어서야 알게 되였습니다. 오송월과 보위부 지도원 아내는 죽은 조카가 살아 있는것처럼 계속 연극 꾸민것도 분노하지만, 아이의 죽은 이유가 황당합니다. 때는 2023년 2월 27일. 살인 강도자는 중국돈 50원으로 마약을 사려고 오송월의 집에 찾아 갔다고 합니다. 오송월은 한국에 있는 탈북민들이 가족들에게 보내는 돈을 가운데서 받아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입니다. 오송월은 보위부 지도원 아내와 짜고, 브로커 질을 하면서 탈북민들의 돈을 갈취해서는 50:50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도 살인자는그날 오송월과 남편이 밖에 나가고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 하던 25살 여자애와 내조카, 다섯살짜리 보위부 지도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21살 짜리 오송월의 막내 딸에게 “돈이 어디 있는가?”고 묻자, “2층에 있다”고 하자, 앞서 걸으라고 하고 창고를 통과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막내딸이 “강도다!”하고 소리치면서 2층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쳐나오자, 뒤따라 온몸이 피 범벅이 된 살인강도도 “강도다”라고 외치며 나오는 것을 지나가던 군인들이 잡았다고 합니다. 이어 북한 보안원들이 현장에 도착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 현장을 본 아줌마의 말을 제가 음성으로 직접 들었는데, 집안은 피바다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오송월의 집에서 마약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보안서 수색결과 오송월 집에서는 무려 10.5킬로그램의 마약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데 그 보위부 집이 얼마나 권력이 대단하고 얼마나 뇌물로 갖다 바쳤는지 칼에 찔려 죽은 25살 어린여자에게 죄를 모두 다 뒤집어 씌우고 사건이 종결 되었다고 하네요. 오송월은 이 사실을 숨기고 자기 집에 온지 이틀밖에 안된 내 조카가 고구마인지 밤인지 구워먹다가 연탄 뚜껑을 똑바로 닫지 않아 애들 세명이 연탄 가스냄새에 죽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사람을 써서 알아보게 해서 들통나자, 오송월이 보위부 지도원 마누라가 했다면서 하는 말이 “제조카 때문에 자기 애들이 죽었다”고 넉두리 한다고 합니다. 미성년자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마약을 팔수가 있나요? 이 사건은 오송월과 보위부 아내의 부패한 욕심 때문에 어린 아이가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권력과 부를 가지면 저렇게 마약때문에 어린 생명들과 불쌍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사건이 종결이 되는지? 이게 북한사회의 권력자들의 실태라 생각하니 분하고 과연 그땅엔 가난한 사람의 죽음은 그냥 묻혀버리고, 누군가의 희생양으로 살아도 상관없는게 현실일까요? 하늘이 두렵지 않나봅니다.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애한테 그런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 오송월과 보위부 지도원 마누라 는 과연 인간이 맞을까요?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세계 언론에 뉴스화 되어 북한의 부패한 권력을 파헤쳐 파렴치한 인간 에게 정의로운 심판의 벌을 주어 마땅하다고 봅니다. 마약이 만병통치약으로 지배하는 나라. 그 만병통치약도 권력과 부패한 인간들의 자금줄이 되여 가는 썩어빠진 세상. 정의가 있다면 정녕 저 땅에 살고 있는 불쌍하고 가엽은 천민들을 대변해주세요. 정녕 권력이 지배하는 그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권세에 맞아죽고, 공권력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어 보지못하고 죽어도 누구하나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회주의 북한정권의 현실이 너무 슬픔니다. 이게 바로 북한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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