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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L MONUMENT FOR LIVES LOST BY THE NORTH KOREAN REGIME
IN REMEMBRANCE
This Was Our Story
이곳은 북한에서 북한 공산독재 체제 하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 정권은 수천만명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핵과 미사일 개발에 나라의 자원을 쏟아부었고, 결과 수백만명의 주민들이 아사했습니다.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김씨 정권의 폭정을 반대하여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도 있고,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한 사람들도 있고, 살길을 찾아 탈출하다 제3국에서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탈북과정에 희생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이름 석자도, 시신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한국 등 자유세계로 나온 탈북민들은 희생자들의 가족이거나 목격자들입니다. 이곳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영혼을 두손 모아 추모합니다.
1. 북한 감옥 옥사자
이름: 정미술(북한의 가족을 위해 익명처리)
생년월일: 1966년생
사망장소: 안전부 구류장
정미술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취미가 많았으나, 희망했던 예술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군대에 끌려가 10년동안 군대복무를 했다. 1991년 어느날 북한 독재자 김정일(김정은의 부친)은 “제대군인들은 어렵고 힘든 부문에 자원 진출하라”며 탄광으로 무리 배치했다.
북한의 탄광은 노동 조건이 열악하여 각종 사건사고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인력난이 심각해지자, 북한 김정일은 1만명 제대군인들을 탄광에 무리 배치했는데, 정미술도 거기에 속한 것이다.
탄광으로 끌려간 정미술은 3년만에 폐결핵에 걸리게 되었다. 1998년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그는 할 수 없이 낡은 자동차 타이어를 떼러 갔다. 그러나 안전부에 붙잡혀 국가재산약탈죄 혐의로 1년 3개월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 북한 감옥은 음식물이 너무 열악하여 수감자들은 밖에서 면회를 가지 않으면 석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그는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열악한 감옥에서 폐렴을 앓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려 몸무게가 30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으나, 북한 당국은 끝내 석방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2000년 1월 감옥에서 원인 모르게 동생과 함께 사망했다. 그와 함께 감옥에 끌려갔던 3명 모두 한날 한시에 사망하였는데, 동료 수감자들은 “안전부가 독살시켰다”는 의혹이 일었다. 북한당국이 그들 3명의 시신을 유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어떻게 처리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2. 북한 공개총살 촬영자
이름: 김해방(가명)
나이: 40대
체포장소: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구역 공개처형장
사망: 2012년 6월
김해방은 2012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 구역에서 자행된 공개처형 장소에서 북한 보위부(국가보위성)에 체포되었다. 그는 단추형 몰래 카메라를 지니고 공개처형 현장을 녹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개총살이 끝나고 북한 보안원들이 공개처형 현장을 쭉 둘러막고 출입구를 한 곳에 만들고 사람들을 하나씩 신분증을 검열한 뒤 내보내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재빨리 옷에 부착되었던 몰래카메라를 뜯어 버리고 출입구를 통과하려고 했으나, 보위원들은 다짜고짜 그를 체포했다. 후에 알고 보니 북한 보위원들이 안전부(경찰)와 협동 하에 그를 잡기 위해 일부러 미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유는 북한당국이 공개총살 장소에 평소보다 사람들을 많이 불러내지 않은 점, 또 공개총살이 집행된 이후 현장을 삥 둘러막고 한 사람씩 통과시킨 점, 그리고 그가 카메라를 버렸는데도 체포한 것이다.
그는 이미 한국에 있는 탈북인권단체와 연계하에 북한의 공개 총살 장면을 몰래 영상으로 찍어 보내던 협조자였다. 그가 보낸 영상들은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도되어 참혹한 북한인권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가 찍은 영상 중에 일본산 혼다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북한 보위부는 이 오토바이 주인이 동영상 촬영자라고 보고, 뒤를 밟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를 체포한 보위부는 함흥시 성천강구역 보위부로 끌고가 한달동안 먹이지도 않고 고문을 들이대어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 대북방송 요원
이름: 진선락
생일: 1964년 생
직위: 자유북한방송국장
함경남도 요덕군이 고향인 진선락은 식량난이 심각했던 2000년 초 중국으로 탈북했다.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뒤, 자유북한방송 국장으로 5년 동안 활동했다. 자유북한방송은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방송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관련 내용을 매일 방송하고 있다. 진선락은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큰 사건들을 단독 보도하여 북한인권을 알리는데 기여하는 등 불철주야로 노력하던 진선락은 신장 결석 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콩팥 제거 후 신장투석을 받는 와중에도 북한 관련 책을 쓰며 병마와 싸웠다. 2019년 북한 자유화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 제목은 ‘외뿌리’이다.
4. 북한정보 활동가
이름: 김철
사망 날짜: 미상
사망 장소: 14호 정치범수용소
김철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시기에 북한을 탈북하여 중국과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그후 자유북한방송 소속되어 북한과 가까운 중국 단동에 거처를 정하고, 북한 소식을 수집해 남한에 전달하는 대북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09년 11월 30일 북한이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한 이후 최초로 북한의 새 화폐를 수집하여 한국에 전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북한 독재자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무리하게 단행했기 때문에 북한 내부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북한당국이 화폐개혁 후유증을 차단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하던 중에 새 화폐 종류가 세상에 공개되자, 북한 보위부는 내부 유출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철은 북한에 있는 아내와 접선하기 위해 평안북도 삭주군 앞 압록강가로 갔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후에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자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북중 국경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평안남도 개천시 14호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사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체처리 장소 알려지지 않았다.
5.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장 파견 노동자
이름: 김명남/ 30대
고향 황해북도 사리원시
황해북도 사리원이 고향인 김명남은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장에 파견되었다. 재러임업대표부 제2연합기업소 산하 17사업소에서 일하던 중 나무에 치어 다리가 절단되었다.
러시아 벌목장에 있는 나무는 길이가 보통 20~30미터이고, 어른 둘이서 다 안을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작업도구도 변변치 않아 북한 벌목 노동자들은 작업하다가 사고를 빈번히 당하고 있다.
나무를 찍을 때 한 사람이 기계톱으로 자르면 여러명이 짝지발로 된 나무를 가지고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으로 밀어야 하는데, 바람이반대방향으로 불거나, 넘어지던 나무가 다른 나무에 걸리면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 사고가 발생한다.
북한 벌목노동자들은 일하다 사고를 당해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김명남은 재소임업대표부 내에서 술장사를 하여 약간의 여비돈을 마련해가지고 북한에 돌아갔으나, 1998년 8월 경 굶어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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